안 그래도 노곤했는데 머리를 감겨주는 손길에 문자 그대로 잠이 쏟아졌다. 유지가 머리를 감기느라 고개를 붙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꾸벅꾸벅 졸다가 중심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남이 몸을 씻겨주는 게 이렇게나 편하고 늘어지는 일이었던가. 섹스 후에 같이 씻는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오늘따라 이토록 몸이 퍼지는 까닭은, 아마 그동안 샤워하는 게 보통 난이도가 아니었기...
“아, 멍이 장난 아니네.” 바지를 내리다 말고 유지가 혀를 내둘렀다. 아아, 하고 나는 허벅지를 힐끗 내려다보았다. 왼쪽 엉덩이부터 허벅지에 걸쳐 녹색에 가까운 푸르스름한 멍이 화려하게 들어 있었다. 사고 당시 차에 직접적으로 받힌 곳이다. “괜찮아? 만지면 아프지 않아?” 유지가 조심스럽게 피부 위를 더듬었다. 피부를 누르지 않도록 신경 써서 어루만지는...
유지의 마음씀씀이는 고마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스쿠나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가 거처의 변화를 달갑게 받아들일 리 없는 것이야 불 보듯 뻔한 일이나, 그래도 사전에 이 일을 알려두는 것과 숨기고 있다가 발각되는 것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전자는 적어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갈등이 발생할 테지만, 후자...
그러니까 유지의 계획이란 이런 거였다. 그제 저녁에 잠깐 우리집에 들렀던 녀석은 내가 서투르게 왼손을 놀리는 걸 보고 이건 안 되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나 나도 기억하고 있듯이, 나는 잠깐이라도 자기 집으로 들어오라는 유지의 권유를 거절했다. 녀석이라면 내가 온종일 침대 위에서 굴러다녀도 좋다고 수발을 들 게 뻔하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녀석이 ...
삼사십 분이면 충분하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유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처음엔 일정이 뜨는 틈을 이용해 가볍게 훑어볼 생각이었는데, 오늘 수업 내용을 복습하면서 모자라다 싶은 부분이나 좀 더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을 듯한 필기를 손봤더니 의외로 시간이 훌쩍 가고 말았다. 후시구로가 시간의 흐름을 눈치챈 건 ‘창문으로 들어오는 빛만으로는 이제 어두우니 강의실...
아직은 낮에 햇빛을 받으며 벤치에 앉아있을 수 있는 날씨였다. 후시구로는 단과대 건물 근처의 적당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자판기에서 뽑아온 녹차 캔의 뜨거움에 손바닥이 아릿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분 뒤면 금세 미지근해질 것이다. 후시구로는 문득 올해도 빨리 간다는 생각을 했다. 반소매만 입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벤치에 캔을 놓고 한 손으로 캔을 따려다...
그러나 상황은 후시구로가 예상한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두 해 같이 지낸 게 아닌데도 후시구로는 아직 쌍둥이들이 자신을 얼마나 위하는지 묘하게 가늠하지 못하는 데가 있었다. 물론 후시구로로서도 쌍둥이들이 저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으리란 것 정도는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도움을 ‘간간이’ 받는 수준으로 쳐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적잖은 오산이었다. ...
꿈을 꿨다. 꿈속에서조차도 쌍둥이들이 나왔다. 쌍둥이는 무슨 일인가로 가벼운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유지가 기다렸다는 듯 호소했다. 할아버지가 퇴원하는 날 짐을 정리해야 하는데 스쿠나가 협조하질 않는다는 것이다. 그 녀석 원래 그 모양인 거 알잖아, 내가 도와줄게. 후시구로가 중재하자 유지는 여전히 부루퉁한 표정이었음에도 일단 고개를 ...
“내일 근무는 어쩌고?” “어차피 우리집 여기서 십오 분 거리인데 뭐. 걱정하지 마.” 후시구로의 걱정을 한마디로 일축한 뒤, 유지는 속 편하게 먼저 잠에 빠졌다. 이 녀석은 아직도 자면서 이불을 걷어찬다. 한쪽으로 치우쳐진 이불을 끌어당겨 목 아래까지 덮어준 뒤, 후시구로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은 벌써 새벽 1시 43분. 들어가면 연락하라던 스쿠나...
결국 뾰족한 결론은 내리지 못한 채 세 사람은 나란히 응급실 문을 나섰다. 스쿠나가 자기 차로 데려다 주겠다고 강권했으나 후시구로는 필사적으로 거절하고 택시를 불렀다. 스쿠나의 차에 탔다간 그대로 스쿠나의 거처에 납치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스쿠나는 서류상의 거주지인 유지의 집 외에 주로 생활하는 곳이 따로 있었다 – . 아직 학기도 마치려면 멀었고, 그...
그날 무슨 정신으로 식은 토스트에 버터와 잼을 발라 넘겼는지는 모른다. 어쨌든, 일단 아침을 입에 밀어넣은 뒤 쌍둥이들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일부러 집을 벗어난 건 후시구로를 배려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이 둘 사이에 또다시 불꽃이 튈까 봐 걱정스럽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지만, 후시구로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어차피 쌍둥이들 사이의 일에 자...
“이제 그만해도 돼.” 후시구로가 단도직입적으로 내놓은 말에, 두 사람은 일순 나란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뭘?” 쌍둥이들이 의외로 협조적인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식사 준비였다. 먹성 좋은 쌍둥이들은 아무리 요란하게 싸워도 그걸 빌미로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 식사 준비에 더 신경을 쓰는 쪽은 뜻밖에도 스쿠나였다. 유지는 그 나이대의 고등학생답게...
쓰고 싶은 것을 쓰는 사람
자유로운 창작이 가능한 기본 포스트
소장본, 굿즈 등 실물 상품을 판매하는 스토어
정기 후원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설정한 기간의 데이터를 파일로 다운로드합니다. 보고서 파일 생성에는 최대 3분이 소요됩니다.
포인트 자동 충전을 해지합니다. 해지하지 않고도 ‘자동 충전 설정 변경하기' 버튼을 눌러 포인트 자동 충전 설정을 변경할 수 있어요. 설정을 변경하고 편리한 자동 충전을 계속 이용해보세요.
중복으로 선택할 수 있어요.